Used Flowers & Fruits
나는 작품을 통해 현대 사회의 일상 속에 스며들어 있지만,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Still Life/정물'에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내 작품관은 평소 우리가 중요히 여기지 않는 사소한 정물이 삶에 풍요와 여유를 일으키는 주된 요소라 여기는 나의 확고한 사상에 기반한다.
정물화(still-life)란 사물의 배열을 다룬 그림을 말한다. 어원은 네덜란드어에서 유행했으나 17세기 중반까지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개념이다. 정물화의 소재는 단순한 사물에서 시작해 시대와 유행의 흐름에 따라 자연물까지 확대되었으며, 특징은 단순한 외부 자연물의 배열이 아닌 그들의 새로운 형태와 조합을 발견해 냄으로써 새로운 화풍의 영역을 창조해 나가는 것이었다.
정물화는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 벽면 장식에 기원을 둔다. 이후, 중세 르네상스 회화에서 정물은 작품의 일부로 등장할 뿐이었지만, 17세기부터 실재를 재현하는 사실주의를 기반으로 알레고리와 바니타스를 적극 채용하여 명확한 내러티브를 지닌 독립적인 장르로 자리 잡았다. 정물화의 소재로써 꽃을 예로 들자면 기독교적 신앙, 계절이 바뀌는 순환, 시들어 버리는 인생의 허무함(바니타스)등의 내러티브를 내포하며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18세기 정물화는 상징적 의미에서 벗어나 화가 개인이나 관객의 감상을 목적으로 그려졌다. 17세기와 18세기 이후,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지역에서 시민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풍속화와 정물화가 주류 장르로 취급됐다. 이와 같은 사회구조와 연관을 맺으며, 정물화 특유의 일상성에 대한 공감은 장르가 발전하는 데 많은 기여를 이루어냈다. 이렇듯 17세기부터 미술사에 등장한 정물화는 일상 사물에 작가의 의도를 투영하여 전달하는 장르이다. 이 같은 정물화의 발달은 특권을 가진 지배 계층만을 대상으로 하는 당시 기존의 예술과는 차별적인 내러티브를 내포하며 미술사적 의의를 지닌다. 그러나, 20세기 전위 예술, 추상 예술, 상업 미술의 발달과 더불어 이전 독창적이었던 정물화의 특성은 점차 시각적인 자극만을 강조하는 대중예술의 성향을 강하게 띄게 되며 진부한 장르로 여겨졌다. 나는 현대인의 '욕구 충족'만을 위해 생산-소비-낭비되는 과정을 겪은 후 '버려진 꽃과 과일'을 주소재로, 나만의 독창적인 예술 기법(painting-photo-painting)을 활용하여 새로운 형식의 '정물화'를 창조한다. 내 작품은 현재 지루한 장르로 전락한 정물화의 장르적 특성과 이미지를 '차용'하여, 나만의 방식으로 재해석 한 '현대판 정물화'이다. 나는 작품을 통해 '현대 사회의 개인/집단'과 인간의 '삶과 죽음'에 관한 나만의 통찰을 전달하고자 한다.
삶을 다해가는 꽃과 과일에 대한 나의 관심은 장식으로 사용된 꽃들이 무관심 속에 버려짐을 목격한 경험에서 시작한다. 일상 속에서 축하와 감사의 의미로 사용되는 꽃들이 특정 순간만을 위해 일회용으로 사용된 후 버려지는 무정한 광경에서 꽃과 과일들에 대한 나의 애정이 꽃피어난다. 나는 향기와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 죽어가는 꽃과 과일을 수집하여 나만의 선과 색으로 채워진 캔버스와 함께 어우러진 모습을 카메라 렌즈에 담는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새로 탄생한 이미지를 캔버스에 출력한 후, 그 위에 다시 '붓-터치(brush stroke)'를 주며 다시 한번 생명을 불어넣어 준다. 출력된 이미지 (캔버스) 위의 붓-터치는 내가 버려진 이들에게 주는 '만지다, 접촉하다, 감동시키다 (touch)'와 그들에게 주는 '위로'를 의미한다. 또한 붓-터치를 사진 위에 얹는 행위를 통해 '사진 (photo)'과 '페인팅 (painting)'의 경계를 흐린다. 나는 작품을 통해 쓰레기처럼 '버려졌던 존재'를 회화를 연상시키는 '정물 작품'으로 승화시키며, 한시적인 존재에게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여 다시 한번 새로운 '생(生)'을 선사한다.
이후 <Used Flowers & Fruits> 시리즈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많은 변화과정을 겪는다. 최근 신작에서는 정물화 형태도 유지하기도 하지만, 정물화의 형식적 구조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식의 정물 작품으로 변화한다. 현재 내 작품은 시대에 따라 변화한 '현시대의 정물화'이자, 오늘날 불안정한 사회에 사는 현대인과 현대사회의 '자화상'을 나타낸다.
